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즈텍 제국 (문단 편집) === 전투 능력의 격차 === 아즈텍이 패배한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전투 능력에서의 차이였다. 당시 아즈텍은 청동기시대와 석기시대의 과도기였다, 금속을 통해서 무기를 만드는 것은 실험적으로 행해졌을 뿐이지 가장 많이 대중적으로 쓰이던 무기들은 대체로 흑요석같은 석기 무기들이었다. 콩키스타도르들은 수백년에 걸친 [[레콩키스타]] 시기를 거친 베테랑들이 대다수였고, 아즈텍이 콩키스타도르와 원주민 연합군들과의 전쟁에서 밀린 것이 단순 꽃 전쟁같은 작은 전쟁에만 특화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반만 맞는 말이었다. 당시 아즈텍은 [[푸레페차]], 즉 [[타라스칸]]과의 전쟁 중 대패를 경험한 이후, 영토 확장을 사실상 단념하게 되면서 비슷한 체급인 국가와의 전쟁이 근 50여년간 부재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 꽃 전쟁만 벌이면서 아즈텍이 전면전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맞는 부분이다. 당시 대규모 전면전이 일어날 일도 없었고, 일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콩키스타도르들의 상륙은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그에 비해서 콩키스타도르들은 전술되어있듯, 근 800년 동안 이어진 스페인의 [[레콩키스타]] 전쟁에서 다져진 [[베테랑]]들이 대다수였고, 무관으로서의 귀족에 충실한 이들이 많았다. 대를 이어서 벌어진 싸움에서 계속 쌓인 [[노하우]]들은 후술할 금속 및 화약무기들과 함께 아즈텍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였다. 만약 이러한 노하우가 없었다면 [[슬픔의 밤]]같은 사건들이 계속 벌어진 끝에 에스파냐 군대는 동맹 원주민 세력들마저도 모두 잃고 흩어져 결국 전멸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당시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전쟁은 끊이지 않았고 이러한 상황에 대를 이어서 전쟁 기술들을 가르친 귀족 세력들은 아즈텍과의 전쟁에서 명백한 우위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콩키스타도르들의 승리 비결이 단순 철로 된 무장이라고 보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맞는 이야기이긴하다. 이러한 것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스페인은 아즈텍을 밀어붙였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들은 단지 유럽에서 가져온 무기를 사용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현지에서 재료를 모아 화약과 포탄을 제조[* 황은 [[포포카테페틀]] [[화산]] [[분화구]]에 직접 들어가서 구했고, [[초석]]은 열대지방 흙에 산재해 있던 걸 물에 타 말려서 채취했으며, 포탄은 [[석환(포탄)|석재로 만들었다.]]]했고, 호수에 띄울 조립식 전함 역시 우호적인 현지 원주민들의 협력하에 직접 건조한 것이었다. [[틀락스칼라]]에서는 원주민들로부터 구리를 공급받아 자체적으로 화살촉을 제작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철제 대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구리(원소)|구리]]와 [[주석(원소)|주석]]을 조합한 청동 대포를 사용했기 때문에 구리와 주석들을 모아서 청동 대포를 만들어 쓴 것이다. 당시 아즈텍을 비롯한 메소아메리카는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사이쯤 되는 [[과도기]] 수준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고, 여러 실생활용 도구들을 만들어서 쓰긴 했으나, 화약의 부재 때문에 그것들로 대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몰랐다.] 게다가 아즈텍에는 금속제 무기가 없었다. 그들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마카후이틀로, 나무 몽둥이에 날카로운 흑요석 날을 여러 개 박아넣은 무기였다. 이 무기는 금속제 갑옷이 아닌 일반적인 직물이나 가죽, 그리고 맨살에는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했으나[* 코르테스가 탄 말의 목이 마콰우이틀에 의해 단번에 잘려나가 코르테스가 죽을 뻔했다는 기록도 있다. 흑요석의 단면은 매우 날카로워서 현대까지도 수술용 [[메스]]로 쓰일 정도다. 그러나 흑요석은 날카롭고 경도가 높은 편이지만, 강도가 낮고 취성이 강해 실제 내구성은 [[강철]]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기에 스페인인의 철제 무기와 부딪히면 깨지거나 부서졌고, 스페인인들의 판금 갑옷에도 전혀 효과가 없었다.], 스페인인들의 갑옷에는 의미가 없었고, 이는 다른 [[흑요석 무기]]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금속 무기도 없는데 금속제 갑옷은 당연히 있을리가 없었다. 당시 메소아메리카의 갑옷은 솜을 넣은 두꺼운 [[누비 갑옷]]들이 주류였다.[* 스페인인들도 나중에는 무거운 판금 갑옷 대신에 아즈텍 방식의 갑옷을 종종 입게 된다. 금속제 갑옷보다 가벼워서 활동하기 편한 데다가, 원주민들의 투석구를 막아내는 데는 그 정도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갑옷은 금속 검과 창, 화살에 당연히 퍽퍽 뚫린다. 여기에 더해서 스페인인들은 금속제 도검과 [[쇠뇌]]는 물론이고 심지어 [[화약]]을 사용하는 [[총]]이나 [[대포]]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러니 아예 화력면에서 아예 게임 자체가 되지 않았다.[* 코르테스 휘하의 스페인인들이 아즈텍에 도착해서 맨 처음 한 행동이 바로 [[화산]]을 찾아다닌 것이었는데, 화산에서는 [[화약]]의 재료가 되는 [[황(원소)|유황]]과 [[초석]]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러한 점을 뒤엎을만한 단점이 스페인인들에게도 있었는데 바로 수가 너무 적다는 점이었다. 당장에 테노치티틀란에 올 때 당시 코르테스가 이끄는 이들은 카리브 원주민까지 합쳐도 1,000명이 안 되었고, 그나마 코르테스가 자신을 토벌하러 온 토벌군을 매수하고서야 2,000명 정도 되었는데 이들이 슬픔의 밤 전투로 사실상 전멸했다. 당장에 슬픔의 밤에서 아즈텍인들은 앞에 있던 아군이 죽건말건 달려들어 코르테스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 정도였기에 아무리 아즈텍이 화력이 딸린다고 해도 압도적인 규모 앞에서는 아즈텍의 희생자가 갑절 이상으로 나도 결국은 스페인군이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를 간단히 말하면 '''[[물량전|한 명 죽이면 한 명이 뒤에서 나타나고 그 한 명을 죽이면 또 뒤에서 나타나면서 점점 적군이 나에게 다가오는 상황]]'''인데 기관총이 없는 이 시대에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아즈텍측도 슬픔의 밤 이전에 강화를 요청하는 스페인측에 처음에는, "우리가 니들 1명 죽일 때 우리 전사 25,000명이나 죽는들 결국 이기는건 우리"라고 말한 바 있다. 즉 '''수적 우세는 경험이고 화력이고 의미없을 정도로 너무 심했다.''' [[기관총]]이라도 있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이 시대엔 기관총 [[그런 건 없다|같은 건 없었다]].] 수적으로 어느 정도 동일하다면야 같은 숫자에 경험과 화력빨까지 살리겠는데 숫자가 적으니, [[인해전술|아군이 얼마나 죽건말건 미친듯이 달려드는 미친 전술]]를 가지고 적군이 공격해오면 답이 없는 것이다. 허나 스페인인들은 운 좋게도 그 문제는 해결할 수 있게 되는데 아즈텍의 패권에 반발하던 지역 부족들의 협력이었다. 당장에 슬픔의 밤 이전에도 코르테스의 병력은 스페인인+카리브 원주민까지 합쳐 2,000명 남짓 되었지만 그와 동맹한 현지 원주민은 8,000명이나 되었다. 물론 [[오툼바 전투]] 당시 아즈텍군이 40,000명이나 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격차지만, 심지어 슬픔의 밤 이후로는 스페인인+동맹한 원주민 숫자가 2,000명 남짓으로 줄어들었어도 그 중에 400명만 스페인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원주민 숫자가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외에 아즈텍인들은 아즈텍식 전투 관습을 버리지 못했다. [[오툼바 전투]]에서 '''20배'''나 많은 병력을 가지고도 패배한 이유가 '''피정복민'''들을 인신공양을 위한 제물로 잡는 '꽃 전쟁' 방식을 '''정복자와 그 동맹'''을 상대로 행했기 때문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